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방위군 사건 (문단 편집) == 여담 == 6.25 전쟁 기간에 한국 군인들이 후방에서 추위에 굶주리다 처참하게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거의 여기 끌려갔다고 보면 된다. 당시 국군의 병참이 형편없긴 했어도 국민방위군 사건처럼 형편없지는 않았다. 심지어 북한 의용군에 끌려가도 밥은 줬다. [[파일:FB_IMG_1474732208114.jpg]] 1951년 [[거창 양민 학살사건]]에 이어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자 [[이시영(정치인)|이시영]]은 이승만 정권에 크게 실망하여 정권을 비판하며 국민에게 전하는 글을 남기고 부통령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나는 정부 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재가 적소에 배치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 데다가 탐관오리는 가는 곳마다 날뛰어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며,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엄을 모독하여서 신생민국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며 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마다 이를 그르다 하되 고칠 줄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시비를 논하는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렇듯 관의 기율이 흐리고 민막(民瘼)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 아니하지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3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생사를 같이 하고자 한다. 시인 [[신동엽(시인)|신동엽]]과 [[정진석(추기경)|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또한 이때 차출되었다. 신동엽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민물 [[게]]를 잡아 생으로 먹었다가 [[간흡충|간디스토마]]에 감염되었고 그게 결국 [[간암]]으로 악화되어 1969년에 38세의 이른 나이로 요절하게 되었다. 정진석 추기경은 여기서 살아남아 다니던 [[서울대학교]] [[공대]]를 그만두고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성직자)|사제]]의 길을 걸었다. 당시 한 의원이 실상 파악을 하러 갈 때 어느 방위군 병사가 거지꼴로 가마니를 뒤집어쓴 채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보고 어디로 가냐고 묻자 이 [[병사]]는 악에 받쳐 '''"[[김일성]]한테 간다, 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북한으로 튀면 더 잘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니 당시 상황이 나온다.[* 그리고 이 말은 '''어느정도 사실이였다.''' 당시 이북 지역은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 제국이 독립 후 남기고 간 중공업 + 발전 시설을 기반으로 하여 단기간에 경제성장 할 수 있었고, 소련이 대한민국을 공산 국가로서 우방국으로 키우기 위한 지원을 펼쳤기 때문에 남한과 북한의 전력차는 압도적으로 커졌으며, 70년도에는 아시아에서 3번째로 컬러 TV를 방영할 정도로 황금기를 맞이했었다. 해방 직후엔 남한에서 생산하는 전력이 터무니없이 작아 북한에게 원조받아야 했을 정도였다. 애초에 6.25 전쟁도 북한이 소련의 뒷배와 자신의 체급을 믿고 남한에게 박치기를 시전한 점도 있다. 하지만 이후 [[김일성]]을 사실상 몰아내고 [[김정일]]이 권력을 잡으면서, 김정일이 일으킨 여러가지 실책 + 대홍수,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로 인한 소련의 지원 감소로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맞게 되면서 끝도 없이 추락하게 된다.] 학자에 따라서는 국민방위군 자체가 북한의 공격을 막는다는 1차 목표 이외에도 [[서북청년회|서북청년단]]과 이승만 친위세력이 [[준군사조직|군과 별도 조직]]으로서 무장하는 단체를 가진다는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도 하나 [[친위대]]에 이렇게 예산 배정과 보급을 개판으로 한다는 건 있을 수 없으므로 큰 설득력은 없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메할 세파리, 케부르 자바나(황실 근위대), [[제3제국]]의 [[슈츠슈타펠]],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장제스]] 휘하 중앙군이나 [[일본 제국]]의 황실 근위사단 전부 넉넉한 봉급과 복지 혜택을 받으며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로 무장한 정예군이었다. 단, 슈츠슈타펠은 최고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중간에 농간을 부려 좋은 장비를 먼저 지급받긴 했지만 국방군에 비하면 정예군은 아니였다.] 당시 육군 통역 장교였던 [[리영희]] 소령은 이때 참상을 목전에서 봤다. 리영희의 주장에 따르면, 군사고문단 [[미 육군]] 장교와 함께 무리하게 보급품을 빼서 그들을 도왔다고 한다. 이 사건을 두고 리영희는 "6·25 전쟁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고 회고하였다. [[http://media.daum.net/society/affair/newsview?newsid=20070320200308904|#]] 이 사건은 이후 리영희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종 책임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인데, 정일권의 한국전 회고록이나 이후 최종판 회고록이 대단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 수록한 반면 '''이 사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 훗날 [[조선일보]] 논설고문이 된 홍사중의 회고에 의하면 운이 좋아서 당시 진주의 국민방위군 교육대에서 군수처 경리 담당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국민방위군 사령부에서 감사가 와도, 서류는 절대 들춰보지 않고 교육대장 및 군수처장의 '''접대'''만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군수처장이 수사가 시작되었으니 같이 도망가야 한다면서 '''직인까지 찍힌 귀향증'''[* 당연하지만 이런 건 전시 상황에서 쉽게 구할 수 없다!]을 들고 왔다고 한다. 더 기막힌 건 홍사중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경리 담당에서 군수처장 보좌관으로 '''승진'''되어 있었다는 것. 한 마디로 이건 [[일본군]]이나 [[독일 국방군]]이 [[미군]] 또는 [[소련군]] 포로에게 했던 짓거리를 자국의 예비 병력 대상으로 저지른 꼴이다. 예를 들자면 독일군이 [[독소전쟁]]에서 사로잡은 소련군 포로들을 식량도 지급하지 않고 혹한에 수백 km를 걷게 하여 포로 사망율이 30%에 달하게 한 일이나[* [[포로는 필요없다]] 참조.] 일본군의 유명한 [[죽음의 행진]]이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애초부터 적국 포로를 절멸시키려는 의도로 실시한 것이고''' 여기에 책임이 있는 군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 [[전범재판]]에 넘겨져 사형과 같은 엄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 국민방위군 사건의 관련자들은 '''적군 포로도 아니라 자국군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종전 후에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이들이 얼마나 극악무도했는지 알 수 있다. 보도연맹 사건이 잠재적인 적이라 생각한 특정 계층 국민을 상대로 [[제노사이드]]를 실행한 사건이라면 이건 자국의 예비 병력을 관리할 의무를 방기한 끝에 제노사이드에 필적하는 참사가 벌어진 셈이다. 도현신 저서 <국가의 배신>에서는 "중공군이나 북한군이 아군을 병사나 노역부로 쓰지 못하도록, 그들이 점령할 것으로 예측되는 지역들에서 미리 청장년들을 포섭하는 것"이 국민방위군의 진정한 목적이었으리라 추정했다. 이미 북한 점령 시기 의용군으로 강제징집한 전례가 있었고 국민방위군의 창설 목적 역시 자국의 예비 병력을 후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국민을 자국의 예비 병력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적의 예비 병력으로 봤다는 확대해석은 편파적인 것이다. 물론 국회에서는 예산까지 배정했고 이것은 군수비리 때문에 제대로 집행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지만, '''결과만 보면 그렇게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전혀 관리나 신경이 없었다. 그 외에도 [[울릉도]]에서는 국민방위군 간부가 월권 행위를 해서 민폐를 끼쳤다. 여기서 기자와 담화하는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20_1951_03_20_0100|국민방위군의 박경구]]는 [[백의사]]의 간부이자 [[독립유공자]]이다.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merit/search_merit_view.jsp?manage_no=8632&judge_case_item_cd=199000_SSG00005_8632&keyword=%E6%9C%B4%E7%B6%93%E4%B9%9D+|#]],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xml_view.jsp?lm_sHisCode=PV_DJ&lm_sBookCode=A010&lm_sItemCode=012.000.000.000&lm_sSrchYear=&keyword=%E6%9C%B4%E7%B6%93%E4%B9%9D+|#]] 1955년에 정부가 한 번 신문광고를 내서 국민방위군 사망자 신고를 받아 331명을 인정해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전사통지서나 그 밖의 서류가 있어야만 신고를 접수해 주었는데 과연 국민방위군 소집자들 중 몇이나 제대로 된 서류를 받았을는지...[* 과거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한 국민방위군 소집자는 분명히 교육대에서 군번을 부여받았는데 기록이 전혀 남지 않았다.] [[파일:attachment/국민방위군 사건/국민방위군_희생자들을_위한_추모비.jpg]] 2002년에야 경북 영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일으킨 [[제11기계화보병사단]]이 창설된 곳이다.]에 국민방위군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를 세웠다. [[밀리터리 실패열전]] 2권에서 다뤘다. 2010년 활동을 종료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내면서 정부의 실태조사와 보상 및 사과, 위령제, 유해 발굴 등을 요구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